나사
제 발로 조리실에 들어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타인의 부탁이든, 일의 연장이든 어쩔 수 없이 의무를 다하는 것과 이유를 찾지 않고 그 안에 서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다. 남자는 불이 꺼진 조리실 안에서 잘못 가져다놓은 조각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물론, 조각상은 잘못된 비유일 것이다. 어떤 조각상도 부품으로 쓰이지 않고, 완전한 하나의 물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개체가 아닌 부품이기 때문에, 서 있는 조각상보단 떨어진 나사나, 떨어진 벽돌 정도가 그의 가치에 어울리는 비유였다.
남자는 숨을 죽인 채 어둠 속에서 빛날 준비를 하고 있는 조리대와 스토브, 연기를 빨아들이는 환기구의 주름진 몸통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적응한 눈은 하나 둘 조리실 안의 실루엣을 구분해 갔고, 불을 켜지 않아도 어떤 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 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나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 때는 인간인척 저 앞에서 조리도구를 만지작거린 적이 있었다.
한영은―우리는 이것을 나사라고 부를 수 있다.―시야에 그려지는 실루엣이 짙어질 때까지 조금 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열린 조리실 문 너머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환기구의 주름 사이로 끼어들어 얼룩덜룩하게 빛나고 있을 냈고, 그의 발치에 일그러진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의 대부분은 조리실의 어둠 속에 섞여들어 그의 그림자로 보이는 건 젓가락의 일부 같은 긴 다리 두 쪽 뿐이었다.
뒤늦게 발을 뗀 남자가 벽을 더듬어 조리실의 불을 켰다. 어둠에 적응한 시야가 번쩍이며 켜지는 조명을 따라 번쩍번쩍, 어지럽게 흔들린다. 불이 켜지기 무섭게 발을 내디딘 한영이 사각의 조리실 안쪽에 들어가 깨끗하게 치워진 조리대 앞에 섰다.
피에 젖은 장갑을 벗고 깨끗이 손을 씻은 다음 조리대에 기대 눈을 감으면 하얗게 구멍이 뚫린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켜켜이 쌓여갔다. 이것도 복제된 기억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과학이란 것이 얼마나 쪼잔하고 우스운 것인가 싶어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새애끼들, 대가리 나쁜 것까지 퍼오면 어떡하냐, 존나 눈치들이 없어요. 소리없이 입을 연 한영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감은 눈을 떴다.
나란히 늘어선 대형 냉장고 문을 열자 희뿌연 한기가 흘러나와 온몸을 적셨다. 흐려진 시야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복제본도 이같은 장면을 보며 눈을 뜰 거란 생각이 들었다. 딱딱한 캡슐 안에서 흐르는 연기와 함께 눈을 뜨는 복제본과 지금의 자신이 같은 시야를 공유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 정말로 그들과 자신이 이어진 것 같았다. 틀을 잘라내지 않은 부품처럼 이어진 기분이 든다. 몸 어딘가에는 틀에 붙어 있던 파츠 연결부위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한영은 그런 것에 일일히 상처받으며 피곤해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레시피는 생각보다 꽤 많았다. 다섯 가지 소스로 각각 맛을 낸 파스타와 부위, 소스를 다르게 해 구운 스테이크, 길쭉한 쌀알을 부드럽게 익힌 리조또와 계란을 풀어 통통하게 부풀린 오믈렛, 재료와 드레싱을 다르게 하면 셀 수 없이 가짓수가 늘어나는 샐러드까지, 밤을 새워 요리해도 전부 만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나쁜 머리로도 하나하나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건, 그가 살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열정을 다한 순간이 그 때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잊은 부분은 손끝이 채울 테고, 손끝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타고난 감으로 채우면 두 자릿수의 레시피를 만들어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레시피에 맞는 재료를 닥치는 대로 꺼내 품에 그러안은 한영이 조리대 위에 재료를 올리고 포장을 벗겨 다듬기 시작했다.
부모의 칼질 이후 반쯤 벌어졌던 손목은 오래 일을 하거나 힘을 줘 무리를 할 때마다 시큰거리며 저려 왔다. 멋모르고 호텔 일을 배워보겠다며 소개를 받아 기어들어간 날, 하루종일 밑재료만 손질을 하다 귀가해 밤새 아픈 손목을 감싸고 뜬눈으로 밤을 지샌 적도 있었다. 한계를 깨닫고 돌아온 동네 레스토랑은 그가 적당히 일할 만큼만 바쁘고 적당히 빈곤했다. 한영은 그것이 자신에게 허락된 부의 넓이라고 생각했다.
꼭 그날처럼 손목이 아린 것은 변태같은 과학자들의 잘못된 복제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점은 개선해서 멀쩡한 인간을 만들어야지, 하여간 책상 앞에서 펜대나 굴리는 놈들은 인생을 모른다고, 그는 짐짓 대범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만들어진 미소를 그리는 동안에도 칼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벗겨진 껍질이 개수대 안으로 떨어졌다.
당근을 씻고, 얇게 껍질을 깎아내고, 감자의 눈을 파내고 껍질을 벗겨 모서리를 다듬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놓는다. 끝과 밑동을 자른 양파의 껍질을 요령 좋게 벗겨내고 그대로 채쳐 찬물에 담가 아린 맛을 빼는 동안 두터운 고기에 오일을 붓고 향신료를 올려 마리네이드를 해 냉장고에 보관해 놓는다. 뻐근한 손목과 누적된 어깨의 피로에 은색 트레이가 무겁게 느껴진다. 무시한다. 색이 고운 비트를 채쳐 놓고, 양배추는 필러로 얇게 저며 풍성한 실뭉치처럼 부풀려 놓는다. 닭다리의 아랫부분에 칼을 넣어 아래쪽 연골을 발라내고 남은 살을 밀어올려 동그란 닭봉을 만든다. 뭉쳐진 살에 칼집을 넣고 향신료를 더해 흰 명주실로 묶어놓고 손질한 통마늘과 함께 예열한 오븐에 넣고 초벌되기를 기다린다. 그동안 보관된 생선을 꺼내 꼬리를 자르고 지느러미를 발라내다 지친 손목이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을 느낀다. 빗나간 칼날 끝이 통통한 생선의 살점을 헤집고 들어가 깊은 상처를 만드는 것을 본다. 무시한다. 껍질에 밀가루를 바르고 손질된 생선을 튀겨 채썬 재료와 각종 조미료, 전분물을 넣고 만든 중화식 소스를 끼얹어 넓은 접시에 담는다. 세밀하게 칼집을 넣은 통양파를 튀겨 채에 받쳐낸 뒤 잘게 썬 파슬리와 마요네즈, 와사비를 섞고 피클을 더한 디핑 소스를 더해 그릇에 담는다. 긴 티스푼으로 접시 주위에 소스를 뿌려 데코레이션을 하다, 꽉 조여든 근육이 손을 손목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빗나간 스푼이 튀겨진 양파 위에 엉망진창으로 소스를 덧바르고, 밀린 양파가 접시를 벗어나 조리대 위를 나뒹굴었다. 무시한다. 엉망이 된 조리대 위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차례로 빈 냄비를 꺼내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렸다. 온도에 맞게 물이 끓을 때 각 냄비에 맞게 스파게티, 펜네, 페투치니를 넣고 타이머를 맞춰 면을 삶는다. 그동안 간단한 소스를 만들고, 냉장고에 있던 소스에 몇 가지 허브를 더해 새로운 맛을 가미했다. 그새 삶아진 면을 건져내 물기를 털고 오일을 더해 붙지 않게 버무려 체에 받쳐놓는다. 손질한 재료와 함께 소스를 볶아 맛이 들 무렵 면을 넣고 다시 열을 가해 맛을 들이고, 알맞게 익은 면이 재료와 어우러질 즈음 그릇에 담고 소스를 부어 마무리를 한다. 두 번째 그릇도 똑같이 담는다. 세 번째 그릇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힘이 빠진 손목이 꺾이면서 떨어진 팬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방 바닥을 굴렀다. 무시한다. 엎질러진 오일과 헝클어진 머리처럼 바닥에 퍼진 면이 눈에 띈다. 다시 무시한다. 무시할 수 없다. 억지로 붙인 손목 아래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우두커니 조리실에 선 나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바닥인 인생, 주제 넘는 꿈은 접어두고 있는 자리에서 제 좆대로 살면 그럭저럭 괜찮은 재미를 볼 거라 생각했다. 수준에 맞는 집을 구하고, 가끔 수준에 맞는 여자를 만나 노닥거리며, 수준에 맞는 레스토랑에서 단 하나 있는 적성을 살려보고 싶었다. 서민, 나쁘지 않지. 한영은 생각했다. 네 글자 사이에 한 글자를 끼워넣으면 그의 과거 회상은 '생각했었다', 라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건너편 조리대엔 그가 완성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일렬로 늘어선 음식들은 분명 흠 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진 것이지만 구차하고 처절한 색을 갖고 있다. 몇 번째 교체품일지 모르는 '나사'가 자신이 원본임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애처로운 증거들이다. 한영이 즐비한 음식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떨림이 멎지 않는 손을 감싸쥔 그가 덩달아 고장난 손을 느리게 쥐었다 펴며 도망치듯 조리실을 벗어났다. 더 해봐, 더 흉내내 봐, 뿌리쳐진 조리실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복도에 나온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사 1호를 치우는 일이었다. 그게 1호일지, 2호일지, 혹은 173호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그가 처음 본 '정한영'이었으므로 한영은 그것을 1호라고 부르기로 했다. 멀쩡한 손목이 달린 손으로 시체를 잡아 끈 한영이 희미한 비상등이 깜박이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이이익, 시체 끄는 소리가 불쾌하게 빈 복도를 긁어내렸다.
1층에 도착한 시체를 끌고 나가 건물 뒤편의 적당한 공터에 도착한 한영이 한 손으로 라이터 불을 당겨 나사 1호의 머리카락에 불을 붙였다. 잘 타지 않는 제복 상의를 잡아당겨 뺏고, 검은 티셔츠에도 불을 당겨 붙였다. 잘 붙지 않던 불이 이윽고 희미한 불씨가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고,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에 힘입어 넘실넘실 온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앞에 주저앉은 한영이 제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장초가 반토막이 나도록 길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뱉자 답답한 속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무더운 여름의 밤에도 바람은 불었고 어설픈 시원함이 몸을 말려주는 게 느껴졌다. 그가 흥얼흥얼, 이름 모를 노래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동안 바람에 기세를 더한 불길이 나사 1호였던 무언가를 무섭게 불태워갔다. 매캐한 살 타는 냄새에 목이 메인다. 치솟는 불길이 그 앞에 앉은 남자의 머리께까지 남실거린다.
잘 탄다. 한영은 다 타버린 담배를 버리고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좆도 아닌 게, 쓸데없이 화려하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