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어떻게 사람이 링크를 주시나요...
* 추억을 살려 관록 쓰는 느낌으로 적었습니다...
* 날짜는... 17일 새벽 즈음일까요
새벽이 핫한 커뮤이니 적당히 커뮤적허용을... (고독한 공간 만듬)
* 캐붕 문제는 언제든지 DM을 두드려주세요 죄송합니다...
흰 얼굴 옆으로 하나 둘, 고양이 수염 같은 대각선이 뻗어나간다. 마인드맵처럼 펼쳐진 선 옆에 일렬로 소항목이 적히기 시작한다. 이름 제레미 제레마이어, 나이 스물 아홉, 직업란에 나란히 적힌 두 개의 직함을 필두로 그를 둘러싼 소문과 정보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간다. 일본인이 아니더라도 국내외 유명인사에 대해서는 알아두는 게 당연한, 직업다운 정보력이었다.
사람을 보면서 기사거리에 해당하는 정보를 떠올리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었지만 상대가 이만큼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알고 있는 정보가 카달로그처럼 펼쳐져 얼굴 옆으로 보이게 마련이었다.
이것이 그가 먼저 말을 붙이지 않은 이유였다. 당장 기사화할 생각이 아니라면 상대방의 정보를 도매 상인처럼 떼어올 이유가 없었고, 일단 말을 섞게 되면 습관처럼 튀어나온 정보 끝을 잡아당길 것이 뻔했다. 그 나름의 배려로 상대는 물론 다른 사람들을 지나쳐 굳게 닫힌 방 문을 보던 사사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눈을 돌렸다. 이제 겨우 열흘이 지난 과거의 일을, 지금도 분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레마이어 씨. 그쪽은 알고 있습니다. 제 담당 지면은 아니지만."
"알고 있다니 정말로? 기쁘네요, 왠지 반갑고. 난 기자를 아주 좋아해요."
예상대로 대화는 테이블 밑 탐색전의 모양을 띄어갔다. 사회 초년생의 나이는 한참 지난 두 사람이 하는 대화는 녹록치 않았고, 상대를 파악하는 질문이 오가면서도 대화는 줄곧 부드럽게 이어졌다. 상대가 불쾌해할 만큼 들어오지는 않는 것이 두 사람의 나이를 짐작하게 하는 증거였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제레미 제레마이어를 관찰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상대를 고려해 가볍게 앞으로 기운 몸, 좁은 칼로 가늘고 깊게 파낸 자리에 박힌 금색의 눈동자와 물처럼 고이다 결국 흘러내려 어깨 아래로 드리우는 긴 머리카락의 실루엣에 더해진 행동들은 보여지길 원하는 만큼 드러났기에, 유연하면서도 어딘가 견고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그때 어깨에 끝이 걸쳐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아래로 기울었다. 가는 풀잎에 맺힌 서리나 눈발처럼 흰 줄기가 앞으로 처져 물방울처럼 고인 모양을 만들다 앞으로 떨어지며 풀어졌다. 작게 출렁이던 물결이 차분히 가라앉을 때, 문득 상대가 물의 모양을 한 얼음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근거 없는 이런 기분을 남자는 기자의 직감으로 분류했다.
"아마 살아날 때 쯤엔, 그렇게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죠? 사사키 씨는 이름으로 불리는 거 좋아하나요?"
"초면엔 이타야로 충분합니다. 이름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요. ...필요를 모르겠어서요."
살면서 몇 명인가는 이름을 부른 적이 있었다. 팀장도 그날의 대작 이후로는 줄곧 이름을 부르고 있고, 만났던 여자라던가 대학 동기 몇 명은 이름을 부르는 사이였었다. 지금은 팀장을 빼곤 전부 흐지부지 없는 듯한 사이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에게 있어 사람은 언제나 매대에 진열된 물건 같았다. 그는 누군가에게 특별해지고 싶지 않았고 타인이 제게 특별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관계를 보장해주지는 않으니까. 물먹인 붓으로 그려 만든 것처럼 완벽한 곡선을 이루는 상대방의 미소를 보며 사사키가 생각했다.
그에게 거대한 상처와 끔찍한 과거가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라긴 했지만 학대나 부조리한 억압을 당한 일도 없었고, 장난처럼 시작됐던 작은 따돌림도 반응이 없으니 사라져 평범한 우등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가 너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흔한 고통과 무료함만이 있었고 인생을 바꿀 만한 행운이나 기쁨은 찾아오지 않았다. 200페이지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반 친구 쯤으로 나와 세 마디 정도의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엑스트라 정도가 그의 역할이자 존재감이었다.
사사키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그에 만족했기 때문에 타인의 인생까지 걸머지지 않기로 결정했다. 알고 지낸지 7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성으로 호명하는 대학 동기 정도가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깊이의 인간관계였다. 작년 즈음, 그 중 누군가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을 때 세상 무섭네, 하고 생각하며 무심히 넘길 수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제레마이어라는 성은 일생일대의 거대한 사건이었다. 엑스트라는 주연을 감당할 수 없고 그 성 앞에 제레미, 라는 이름이 붙으면 더더욱 까마득한 무게가 느껴졌다. 어설프게 어울렸다간 주제 넘는 행동의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결국 그는 두려워했다. 최선을 다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좌절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게, 그것이 자신이 자신이기 때문이라는 운명론적인 이야기에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 생각은 그가 서른을 넘기도록 그의 가치관을 지배해온 유일한 신념이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주무세요."
"이제 주무시는 건가요? 잘 자요~"
가볍게 흔드는 손에 약식의 묵례로 답하고 돌아선다. 사방에서 종이를 갉는 듯 부드럽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등지고 배정된 방으로 들어와 제 방의 문을 열었다. 닫은 문에 기대 눈을 감자 유일하게 목을 맸던 일이 자신의 목을 졸라온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에 수많은 '의례'와 '눈치'를 수용해야 했고, 사사키는 그 일이 불러온 결과를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설프게 어울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 물은 쏟아지기만 하고 당신은 한결같이 얼음일 테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부터 언제나 로비에서 마주칠 때면 긴 대화가 이어졌다. 오래도록 다른 동물을 보지 못한 개과 짐승들이 상대의 주변을 맴돌고 목덜미에 코를 묻어 냄새를 확인하는 것처럼 긴 공방이었다. 적어도 그는 이 대화가 공방이라 생각했다. 상대가 어울리지 않는 걱정을 섞어 한숨을 쉬기 전까지는.
'대충 어디쯤...인 상처도 쌓이면 아주 아프니까요~ 잘 치료해두세요. 도박...보다는요.'
의외의 말에 내리깐 시선이 바로 올라붙었다. 몇 초 얼굴을 바라보다 눈을 돌렸을 때, 녹지 않을 줄 알았던 얼음에서 물기가 느껴지는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에도 자신은 한 걸음 물러나며 머리를 굴렸다. 나약한 사람 특유의 눈치와 요령만 는 태도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보상이라도 정해두는 건 어떤가요. 내기라면 당신도 관심이 있을 텐데요.'
제안에 마침표를 찍고 보상을 정하기까지 그는 이 일이 어떤 의미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뛰고 있으니 위험을 무릅쓰며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첫날 빠르게 정보를 주고 받는 사람들을 본 뒤로, 기껏 나가더라도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를 확인하듯 뒤적이는 게 그가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반신반의했던, 한 명만 미션을 수행해도 모두가 살 수 있다는 말을 믿어갈 즈음의 행동이었다.
그 날은 새 시스템에 흥미가 생겨 한 번은 경험할 요량으로 천천히 마실을 나갔다. 관심 가는 장소를 둘러보고,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며 휴대폰의 앱에 차례차례 화폐를 적립했다. 궁금했던 마인드리딩은 막상 써보니 안에서 치고 올라오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원하던 수금은 순조로웠고 이전처럼 괴물을 조우하지도 않았다. 도중에 만난 아담한 여우신의 사당은 친숙한 느낌에 자못 반가울 정도였다.
매일 산책으로 끝날 리 없겠지만 그 기계가 우리를 단계적으로 성장시키려 한다면 별 일이 생기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장까지 들러 볼 일을 보았다. 휴대폰에 딸린 프로그램과 만담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E 거리에 도착한 그가 시간을 보고 안전지대로 몸을 돌렸다. 중간에 화폐 수급이 가능한 장소를 정리해 안내했으니 전날보다 화폐 수급이 원활했을 테고, 사람들이 자판기를 돌리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한 실내가 어쩐지 어수선했다.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작은 알림창에 차례로 올라오는 메시지가 잊을 수 없는 장기 기억으로 넘어간다.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느껴져야 할 타인의 위험이 무겁게 느껴졌을 때 그는 그 내기가 제 안에서 약속으로 변했음을 깨달았다.
도움을 받아 들어오는 제레미를 볼 때까지 로비의 조각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자신은 분명히 잘못되어 있었다. 잘못하고 있다는 말도 부정할 수 없었다. 간절한 일에 매달리는 양 목숨을 대가로 내기를 걸고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는 생각이 그의 발목을 족쇄처럼 부여잡았다.
덩그러니 선 자리를 지키는 동안 바삐 움직이며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제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놀란 사람들에게 정황을 설명하는 제레미의 목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한꺼풀 무겁고 멀게 느껴졌다. 불현듯 자신이 더 나아지기는 커녕 물러나기 어려울 만큼 최저의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닫고 만다.
조용해진 방에 들어가 의례적인 인사로 시작한 말이 답지 않게 길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몇 마디 문병에 어울리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고, 화두를 꺼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레미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착하고 좋은 사람 되고 싶어요? 흰 침대보보다 하얗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가진 상대가 질문했을 때 단호하게 시작한 첫마디가 결국은 열댓 개의 점으로 끝나버렸다.
"... 큰 일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말이 길었네요. 이런 말을 하려고......"
당신이 말하는 위로라는 것을, 나도 주워섬겨야 했었다고 생각했다.
새벽에도 지지 않고 복닥거리는 로비도 4시를 지나면 조금씩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끼리끼리 모여 떠드는 사람들을 제하면 계단으로 향하는 불마저 꺼진 실내는 새벽에 기대 고해하기 좋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비밀을 지켜줄 테니 마음껏 고해보라고, 이슬에 젖은 축축한 손을 흔들어 사람을 부추긴다.
떠들던 사람들이 각자의 방으로 모습을 감추고, 모임이 파할 때의 헛헛한 공기가 천천히 실내를 집어삼켰다. 하나 둘 조명이 조도를 낮춰가고 숨을 죽이는 건물 안에서 사사키가 제 방과 똑같이 생긴 방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방에 배분된 좁은 거실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은 조용한 밤이었다.
"...주무십니까?"
잠시 정적. 이 시간에 사람을 깨우는 건 어느 나라 문화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실례임에도 곧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 이타야 씨인가요? 이 시간에 문을 두드린다는 건... 혼자서는 잘 수 없는 어른이란 걸까요. 의외의 모습입니다..."
"...금방 갈 테니 열지 마세요."
장난을 담은 대답은 언론에 비춰지는 제레미 제레마이어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 이미지가 어떤 거대한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는지, 그 뒤에 얼마나 대단한 배경과 능력이 있는지 사사키는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주연은 엑스트라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관계를 만들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그 장난이,
"...당신은 저를 더 위험하게 만들었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찾아온 사람을 긴장하게 하지 않기 위한 배려라는 걸 알아버린 탓이었다.
"이 편이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노력에 협조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 내 몫까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덜 말한 문장을 삼킨 그가 손을 들어올려 손목에 감긴 손목시계를 풀었다. 어스름한 어둠에 잠긴 닫힌 문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복도에 선 남자 혼자 태연히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질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타고난 운이 없어서요. 길에서 찾은 물건은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물건을 선물할 수 없으니 제가 가진 의미를 드려보려고요. ......"
딱, 소리를 내며 후크가 풀린 은색 손목시계가 부드러운 마찰음을 내며 찰랑거렸다. 모아 쥔 시계를 문 옆의 벽 아래쪽에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바닥에 몸을 뉘이는 시계마저도 숨을 죽인 새벽에 오직 한 사람만 입을 열고 있었다.
"...입사할 때 처음으로 산 시계입니다. 제가 지금 가진 것 중 비싼 건 이것 정도네요... 쇼핑할 시간도 없어서요. ...좋아하는 일을 시작할 때 산 물건이니 제게는 의미가 있습니다. 빌려드릴 테니 의미를 쓰고 돌려주세요. ... 의미가 없어지기 전까진 돌려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럼 주무세요. ...제레마이어 씨. 인사를 마치고 돌아설 때 끝끝내 성을 고집한 것을 알고 있다. 성을 부르기 전 잠깐의 공백이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그는 제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관계에 회의적이었지만, 언젠가 방금 전의 공백을 만들어낸 이유로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