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M의 초상
화면을 꽉 채운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날짜에 해당하는 사각의 흰색 칸에 붉은색 엑스 자가 그려지는 환상을 본다. 그를 따라다니는 최저의 자기평가는 매일 새로운 숫자를 갱신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밤새 울음소리를 들은 머리가 무겁게 울려왔다. 어항처럼 물이 가득 찬 머리를 기울이면 구멍이 달린 귀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피곤한 얼굴로 침대를 내려온 남자가 하품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사각의 커다란 거울에 피곤하고 예민한 얼굴이 노골적으로 비친다. 둥그런 안경도 회사 근처의 커피도 없는 잠에서 깬 직후의 이타야 사사키 같은 얼굴이다. 물을 틀어 가볍게 얼굴을 문지른 그가 칫솔을 꺼내 치약을 짰다. 물도 묻히지 않은 칫솔을 입안에 밀어 넣자 끈적한 민트맛 크림의 질감이 느껴졌다.
M은 세상을 떠나 남자의 꿈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종종 M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것이 현실에 남은 M의 유일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누군가 M을 제령 하라고 권한 것처럼 수시로 행동을 거부했다. 아니, 괴롭히지는 않으니까.
그의 말대로 꿈속의 M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제 몸처럼 가지고 다니던 갈색 가방을 내려둔 채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주저하다 손을 뻗은 날 반투명한 M의 몸을 통과하는 제 손을 보며 반사적으로 닿지 않으면 해를 입힐 수도 없다고 안심한 자신만이 유일한 경멸이었다.
그날 이후 M은 간헐적으로 그의 꿈에 나타나 울기 시작했다.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만져지지 않는 상대를 만지는 우스꽝스런 제스쳐도 취해봤지만 M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물이 떨어지는 분수대처럼 울기만 했다. 언제 뒤집힌 눈으로 자신을 노려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습게도, M은 한 달 내내 그의 꿈속에서 눈물만 떨어뜨렸다.
이것이 그가 문지방에 소금 한 줌 쌓아놓지 못한 이유였다. 가까운 신사에 들러 기도 한 번 올리지 않은 것도, 교회를 다녀볼까 기웃거리던 그가 다시 무교의 길로 돌아선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남의 꿈에 나타나 울기만 하는 것이 M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의 증명이라면 감히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제 꿈에서 쫓겨난 M이 어디로 가게 될지 생각하면 세상은 인간 하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커다란 과자 상자에 하나 남은 과자가 낙엽처럼 굴러다니는 것처럼, 텅 빈 세상의 부속품이 된 기분이었다.
덜 마른 머리로 셔츠에 팔을 꿰어 넣은 그가 의자에 널어놓은 코트를 집어 들었다. 상대는 점심시간을 말했지만 그는 점심까지 기다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렇게 여유를 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죄책감을 덜어주는 근거가 되길 바랐다. 짙은 회색의 서류 가방을 든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여름이 언제였냐는 듯 부쩍 차가워진 공기가 길을 걷는 사람들을 한 번씩 건드리고 지나갔다. 휙,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뒤척이며 옷을 추스리는 사람들은 잠결에 순서 없이 뒤척이는 새끼동물 무리 같았다. 지하철이 가까워질수록 인파가 늘어나며 바람이 낄 자리가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더이상 뒤척이지 않았다.
역 안으로 들어가자 뒤척거릴 공간마저 사라졌다. 이래서야 차가 제시간에 도착해도 줄 끝에서 동동거리다 다음 차를 타야 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똑같이 초조해하는 사람들만 모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고 밀리길 반복하다 어느 순간 좌우로 빠져나간 사람들로 시야가 트였다. 평소 출근할 때 타는 노선으로 우르르 사라지는 사람들의 뒤꽁무니가 보였다. 남은 인파 속에 섞인 사사키가 평소 타던 노선과 반대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운 좋게 한쪽 끄트머리의 맨 앞줄을 차지한 사사키가 가방을 제 몸에 붙여 안았다. 지하철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사람들 사이를 비집기 좋은 자세를 취한다. 이윽고 안내 방송이 들리고,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짐을 든 사람들이 평일 오전의 피로함이 가득 묻은 얼굴로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그 역시 손목을 틀어 시간을 확인했다. 도착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꿈속의 M이 눈물을 흘리는 동안 어느새 빗물처럼 고인 바닥의 물기가 자박하게 밟히는 감각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외근 신청까지 하고 출근을 미룰 만큼 급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삿키. 지난번에 그거, 풀었으니까 가져가라. 나중에 연예인이라던가, 소개시켜 달라고. 너는 기자니까.'
나카노의 가벼운 목소리와 냉정하게 기각하는 자신의 대답이 떠올랐다. 급하게 밀려오는 기억처럼, 저 멀리서부터 미약한 진동을 내며 지하철이 달려온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 안내 방송이 지하철 진입을 알리자 자리에 선 사람들이 마라톤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희미한 불빛이 보이고, 안전선까지 딱 반걸음만 더 내디뎠다.
생각대로는 그랬던 것 같다. 한 발을 떼는 순간 뒤에서 무거운 충격이 느껴졌다. 내밀린 몸이 선로에 던져지고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밀리는 동안 그랬는지, 밀리기 전이었는지, 아니면 딱딱한 철골 구조물에 자신이 쓰러진 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먼지가 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자 손이 닿은 바닥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손바닥을 타고 팔까지 와르르 떨리는 진동이 머릿속의 생각까지 뒤섞어 놓는다. 거대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공기를 울리는 것처럼 지하철의 요동치는 소리가 맹수처럼 선로를 울렸다. 쏟아지는 빛의 중심이 주먹만 한 크기에서 작은 공만 한 크기로 바뀌기까지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했다. 사방의 비명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달려오는 은색과 흰색의 지하철이 내지르는 소리만 뚜렷하게 들려왔다.
이제 M은 누구의 꿈으로 갈까, 아니면 아주 사라질까. 연고도 없다는 그 애가 세상 누구의 꿈속에 들어가 오늘과 같이 하염없이 울 수 있을까. 그녀의 친구에게 가면 좋겠다. 제령 같은 걸 하지 않을 만한 너그럽고 좋은 친구로.
아무렴, 누구든 나보다 좋은 선택을 할,
.